본문 바로가기

보여지다/출간된 글

청백리-자연의 순리(順理)를 깨친 스승

요즘 사람들은 옷이 떨어져도 꿰매어 입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단추가 떨어져도 세탁소에 맡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 집에 반짇고리 하나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바느질을 하거나 뜨개질 하는 것이 취미 혹은 특기가 되어버린 듯하다. 비단 바느질뿐만이 아니다. 간단한 목공이나 미장 등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조차 제 스스로 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 역시도 리모델링이라는 명목 하에 또 다른 취미생활 혹은 직업의 영역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돈을 지불하고 다른 이의 도움을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오늘날 모습이다.

 

아이들도 필요한 것들은 으레 돈을 주고 사는 것으로 알지, 만들고 수선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니 뭔가를 아껴 쓰고 고쳐 쓰는 것보다 돈을 주고 새로 사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인지 모른다. 혹여 아껴 쓰고 고쳐 쓰는 모습이라도 보일라치면 그런 것은 없는 살림 드러내는 궁상맞은 행동으로 여기기 일쑤다. 물질이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는 탓이라고 치부하기엔 뭔가 놓쳐버린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에버렛이 쓴 책에서 읽은 내용이다. 피다한 사람들은 꼭 필요한 것만 취한다고 한다. 음식이든 기타 물질이든. 그들은 ‘뚱뚱하다는 것은 곧 타락했다는 증거다. 살이 찐 사람들은 게으름뱅이일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을 차지한 욕심 많은 사람들이다’라고 생각한단다. 사람들이 먹고 사용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46억 이상 나이를 먹은 지구에서 얻는다. 과거 조상들이 그러했고, 우리가 그러하고, 앞으로 우리의 아이들이 또 그러할 것이다. 우리가 필요이상으로 무언가를 더 사용하게 되면 다른 누군가는 사용하지 못하는 유한(有限)의 공간에 살고 있다.

 

검소한 삶은 어느 시대이든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검소하게 살기 위해서는 유한의 지구와 다음 세대를 고민하는 거창함을 떠나서라도 당장 일신의 편안함과 욕심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고종까지 26대 임금이 배출되는 동안, 청백리 218인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청백’·‘근검’·‘경효(敬孝)’·‘후덕(厚德)’·‘인의(仁義)’ 등의 품행을 보아 경외 2품 이상 관인 중 의정부와 이조가 각각 2인씩을 추천하고 다시 육조판서가 심사한 뒤 국왕의 재가를 얻어 확정하였다 한다. 이들은 대부분이 국록 이외에 공가(公家, 국가)나 사가(私家, 개인)에 일체 폐를 끼치지 않고 깨끗하고 검소한 것을 생활 철학으로 살아간 인물이었다. 이점에서 청백리는 ‘청백탁이(淸白卓異)’가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고 하겠다. 청백리는 사회적으로 존경 받고, 관리에게 염·치를 일깨우고 탐관오리에게는 자극을 주는 정화 기능을 어느 정도 발휘하였다 한다.

 

청백리 하면 가장 떠올리는 황희 정승을 비롯하여 한수이북에는 최익현, 이항복, 이덕형, 백인걸 등의 청백리를 기억하고 있다. 청백리가 관리를 경계하고 백성을 계도하기 위해서만 검소하게 살았던 것일까? 사회적으로 보여지는 모습의 효과는 그러했을지라도 아마도 그 분들은 자연의 순리(順理)를 깨쳤기 때문일 것이다. 필요한 것 이상으로 소비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보통 사람인 우리가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삶의 지혜, 더불어 건강하게 공존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jeong_d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