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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직장인은 전업주부가 필요해

<辛禧宙> 2025. 8. 23. 15:43

복지에 관해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더불어 함께 해야 한다고. 그런데 궁금하다. 사람들이 말하는 복지는 어떤 의미일까? 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철학을 바탕으로 복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하물며 한 국가의 지도자는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는가? 가야 할 방향에 관한 합의가 전제되지 않은 지향점은 우왕좌왕할 뿐 그 어느 곳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일관되지 않은 정책들이 시행되고 사라지고를 반복하다가 세금만 허공에 사라지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야 할 국가는 한 정권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현재 실정에는 요원해 보일지라도 차근차근히 과거에 이어 벽돌 하나 더 놓으며 한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는 끈기와 지속성, 그리고 일관된 철학이 공유되어야 한다.

당장 육아정책에 관해서도 사람들의 생각은 제 각각이다. 이 문제를 따지자니 복지에 관한 기본 전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접근은 달라지게 된다. ‘다음 세대’의 생산이 고스란히 가족단위의 책임으로 전가될 문제여서 각 가정이 알아서 해결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25년 전후의 시간을 각 가정에서 끙끙대고 돌보아 생산해낸 성인을 ‘노동’의 범주로 편입시키겠다는 입장은 전형적인 자유주의 유형이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돌봄’의 대부분은 가부장적 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성역할분리 등의 논리로 한 가족구성원이 떠맡게 되거나 서비스시장에서 조달하는 것이 기본이며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기준 이하의 가정에 대해 공공부조를 제공한다. 어떠한 형태로든 계급간 연대를 바탕으로 하여 보편적 사회권을 주장하는 복지국가에서 말하는 사회적 재분배(소득양극화 해소)는 이뤄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방법이 합리적인 것 같다고 기득권층의 이기심이 담긴 주장을 말하고 배우고 있다. 자신은 중산층이라고 믿고 싶은 대부분 사람들의 희망과 맞물려서.

사회보장제도의 확충이 다른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현재 노동시장 안의 지위와 연동된 사회보장제도는 각 계급내의 재분배를 넘어선 사회적 재분배는 기대할 수 없다. 보수주의 유형으로 분류되는 이 역시도 ‘돌봄’의 영역은 가정의 문제로 남겨두는 것이어서 노동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가족구성원(성별분화와 가족돌봄으로 노동시장 참여에 제약을 받는 자)은 적극적으로 사회권을 주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지 못한다. 복지의 대상이 개인단위가 아닌 가구단위로 접근하는 위와 같은 사회에서는 여전히 아침식사를 위해 새벽에 일어나야 하고, 아이를 챙겨 교육을 하고, 아이의 문제로 수시로 학교에 불려가 청소하고 배식하고 안전관리하고 행사에 동원되고, 아이들 등하교 시간에 맞춰 배웅과 마중하면서 학부형들과 교류하지 않으면 고스란히 아이의 왕따를 걱정해야 하며, 야근하는 배우자의 빈자리를 채워가며, 동동거리며 집안일과 대소사를 챙기면서도 늘 ‘집에서 논다’라고 말하는 전업주부가 존재한다. 아울러 노동시장에서의 노동시간의 구성은 이런 ‘전업주부’의 존재를 전제로 돌아가고 있어 대한민국의 모든 직장인은 남녀를 떠나 ‘전업주부’가 필요한 구조다. ‘전업주부’를 구하지 못한 가정에서는 ‘엄마’라는 말로 치환되어 조퇴하고 결근하고, 일이 많아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가족의 눈치를 봐야 하면서도 죄책감을 강요 받고, 가사일을 ‘도와준다’는 배우자 및 그 동료들의 공치사를 견뎌야 한다. 어느 입장에서도 사회에서 온전히 설 수 있는 지위를 보장받지 못한다. 어느 개인도 노동과 돌봄을 모두 병행하지 않으면 개인과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기본 전제가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정답은 없다. 그러나 개개인이 모두 행복하지 않은 가정은 행복한 가족이 아니며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복지국가도 아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제자리 걸음만 할 뿐이다. 건강한 복지국가는 복지대상이 개인에게 맞춰줘야 하며(사회권 수급의 단위가 개인) 노동과 돌봄이 사회구성원 모두가 하는 것이라는 연대의식,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전제한다. 사회권 보장은 자본주의 시장구조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성을 완화하고 고용불안정성에 기인한 생활불안에 버팀목을 제공하는 것이며 국가의 존립과 유지로 이어지는 것임을 정책입안자의 의식바탕에 각인되어야 한다. 이런 바탕 위에 설정된 방향대로 우선순위에 따라 정책이 마련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치인이 사회를 인식하는 프레임 안에 바탕이 된 철학과 의식을 살펴야 하는 이유고 기본을 논의하는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교양을 갖춘 시민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시작점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각도계의 끝은 시간을 더하면서 더 벌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