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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하지 않았지만, 경의를 표한다: 김용복 총장님을 회고하며

<辛禧宙> 2025. 7. 1. 19:32

김용복 총장님이 계셨다. 생전에 나는 그분과 여러 차례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분의 말씀 하나하나에 늘 반론을 제기하곤 했다.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신기하게도 그분이 남긴 말들이 내 안에 남아 학문적 고민의 밑거름이 되어 있음을 자주 깨닫는다.

 나는 개신교 신자가 아니다. 그분의 모든 활동에서 동원되는 종교의 사회적 참여와 평화에 대한 접근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다. 평화통일을 말씀하시면 나는 통일이 아니라 평화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매번 딴지를 거는 사람이었다. 몇 다리를 건너면 알만한 얄팍한 인연일 수 있었지만, 부모님 대학 선배와 후배의 자녀라는 관계로 퉁 쳐져 격의 없이 관계가 이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버릇없이 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이런 인연을 떠나, 그분이 보여준 일관된 삶의 태도와 평화통일을 향한 진지한 실천에는 깊은 경의를 표한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존중하지 않을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분이 내게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를 진심으로 물었던 몇 안 되는 분이라는 점이다. 그때까지 내가 곧잘 듣던 말 중 하나가, 내가 “왜?”를 물어봐 주는 보기 드문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때까지, 적지 않은 나이에 접어든 나에게 ‘왜’를 질문해준 사람이 있었던가를 돌이켜보면, 그분이 거의 유일했다. 나는 그분 앞에서 내 생각을 가감 없이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분 역시 그 말의 저변에 깔린 맥락과 의미를 정확히 읽어 내셨다. 단순한 대화의 수준에서 그치지 않았다. 프린스턴대 철학박사인 그 분이, 학문의 거의 전영역을 넘나드는 것은 물론, 사회의 거의 전분야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대화가 어떻게 가능한가, 난 늘 의문이었다. 물론 그 분도 만능은 아니어서 많은 부분을 내게 질문하기도 하셨지만 며칠의 기간을 두고 다시 뵐 때면 그 차이를 곧잘 메워 내시곤 했다. 그건 서로의 사유가 충돌하고 확장되는 일종의 지적 자극이었고, 나 역시 그 과정 속에서 사고의 경계라는 것은 사라지고 없어짐을 경험하곤 했다.

 어느 날, 그분은 내게 물었다. “결국, 선생님은 무엇을 하려는 겁니까?”
나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답했다. “결국 문화 커뮤니케이션을 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여건이 허락한다면 보다 다양한 층위에서.” 그리고 덧붙였다. 내가 말하는 ‘문화’는 예술이나 관습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환경의 개념에 더 가깝다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그 사이 상호작용 속 권력, 그리고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 그 과정 중 속도와 의미의 문제와 인식과 관계된다고.

 그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충분히 이해하셨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그러면 되었지요.”
그 짧은 한마디가 얼마나 오래 남는지 모른다. 더 이상 아무 설명이 필요 없다는 듯, 온전한 이해가 이뤄진 듯했다. 마치 성유보 선생님과 함께 한 어느 날, 선생님께서 내게 해 주셨던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것이 이미 충분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 말 한 마디에 그동안의 모든 시간을 위로 받은 느낌이어서 와르르 무너졌던 기억이 있다. 서로의 언어가 전혀 다르면서도 본질의 층위에서는 통한다는 느낌. 전공도 다르고, 세대도 다르고, 살아온 맥락도 달랐지만, 그분은 이미 내가 말한 ‘문화’의 구조적 함의를 완전히 이해하고 계었다. 단순한 지적 수용이 아니라, 사유의 깊이에서 이미 그루의 반열에 계신 것이 아닌가 싶었다.

 팔레스타인 열린지식 도서관, 세계여성포럼, 세계평화포럼, DMZ 평화도시건설, 글로벌 대학원대학교, 피폭피해자지원, 사회적경제 협동조합, 희년재단의 구상, 내가 제안했던 프로젝트 플랫폼 사업, 재원조달방식을 위한 재단설립, 금융사업(가상화폐), 움 프로젝트 등의 코이카사업, 평화커뮤니케이션교육 같은 이야기들도 그렇게 오고 갔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이 요원한 얘기들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시던 무모한 도전들에 의해 그분의 그간 개인의 삶이 온전하지 않음을 지켜보며 나는 기꺼이 발을 깊숙이 들이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분이 요청하시면 마지못해 동원되는 편에 더 가까웠다.

 오늘날 사회 곳곳에서 파편적으로 등장하는 여러 정책들—기본소득, 예술인 지원금, 교과서문제, 부채 탕감 같은 제도들—을 보며 나는 종종 그분을 다시 떠올린다. 그것들은 마치 이런 오랜 구조적 고민이 생략된 채 갑자기 뚝 던져진 단발성 해법처럼 보일 때가 많다. 나는 그런 순간마다 묻게 된다. “그분이라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나는 그분과 생각이 자주 달랐다. 그러나 다름을 견디며 함께할 줄 아는 태도,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 시간과 상대를 견뎌내는 그분의 모습을 나는 자주 떠올린다. 또 힘있는 자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 노력하던 모습도 떠올린다. 그것은 비굴함이 아니었다. 존엄을 지키는 방식이었다. 한때 어떤 사람들은 그런 태도를 폄하하며 ‘거지근성’이라 말하기도 했다. 어느 날, 모 회장님과 협의가 원만하지 않자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신 기억이 있다. 제도 안에서 “길들이는 방법을 터득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더 오래 기억하고 버텨내야 한다. 체념이나 자기포기의 태도가 아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두고 보면서도, 나를 잃지 않는 방식이어야 한다. 타인을 존중하면서도 스스로의 존재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 그분은 그런 방식으로 평화를 말하고, 종국 길을 열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남들 눈에는 작게만 보일 하나의 프로젝트를 이뤄내는데 10년 이상의 세월을 보내면서. 보기에는 기존 내 눈높이와 속도에는 영 못미치는, 또 그 과정을 미리 알았더라면 지레 포기하고 말았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이를 이루어내기 위해 정말 아주 작은 힘들을, 숨은 구석구석에서 찾아내고 또 동의를 얻어내 가며, 알토란처럼 모아내신 힘의 결과물임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분과의 인연 이후, 내 삶 주변에는 현실적 실행력은 부족하지만 이상만 가득한 사람들—소위 ‘이상주의자들’—이 자연스럽게 몰려들었다. 그들의 선의와 열정은 의심할 수 없었지만, 정작 구조적 감각이나 현실을 돌파하는 능력은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그들을 보는 나의 시선은 오랫동안 복잡했다. 어쩌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가 그들을 수용할 구조를 마련하지 못했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제 위치와 가치를 적절히 찾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그런 그들을 감당해야 했던 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분과 인연을 맺으며 내 인생은 여러모로 많이 꼬였다. 소위 '돈 안 되는 인맥'이 늘어났고, 사업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관계들이 나를 지치게 했다. 어떤 사람들은 나의 방향을 이해하지 못했고, 때론 나를 공격하기도 했고, 나는 그들과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며 오래 시간 버텨내야만 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사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서로가 놓인 ‘포지션’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같은 장면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현실에 발을 디디고 서로에게 맞지 않는 기대를 품고 있었기 때문임을 안다.

 모든 걸 이상화하고 싶지는 않다. 이를테면, 그분이 툭하면 평화통일, 3*1운동, 동학운동을 강조하던 모습은 내게 그리 마뜩치 않았다. 북녘이 고향이신 그분에게는 통일이라는 말에 각별한 무게가 실려 있었겠지만, 나로서는 통일보다는 ‘평화’ 그 자체에 더 방점을 두었다. 무조건적인 민족주의나 동일성의 회복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공동체 내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를 더 중요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또 우선적인 저항의 논리보다 구조의 이유와 특정무리의 배제가 아닌 모두의 공존을 나는 더 중히 생각한다. 그러나 그 방향을 향한 그분의 한결같은 진심과 의지에는 지금도 경의를 보낸다.

 그리고 이제, 그분이 소천하신 지도 몇 해가 지났다. 정권이 바뀌고, 정책들이 다시 거론되는 지금, 나는 그분과 나누었던 대화의 흔적들이 정책에 반영되어 있음을 발견하며 그 지난한 세월의 삶을 생각한다. 기사연과 YMCA를 거치며 대한민국 초기부터 민주화운동을 해오던 많은 원로들의 퇴색을 지켜보면서 그럼에도 나는 선지자들의 선견지명에 의한 고민과 눈길의 발자국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싶다. 이 글은 그 기억을, 다시 생각의 중심으로 불러내기 위한 소환의 시작점이다.